스팍이 제 목을 감싸던 손을 떼고 명상 매트에서 일어났다. 본즈도, 미래의 샌프란시스코나 엔터프라이즈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스팍의 아파트인 것 같았다.
명상실 밖으로 나갔다가 명상 전에는 어둡던 밖이 훤한 데에 놀랐다. 벌써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이브가 된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시간대로 시간 여행을 한 걸까?
스팍이 식탁 위에 올려둔 전자패드를 집어 들고 시간을 보니 ‘십이월 이십사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짐의 집으로 찾아가 결국에는 짐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으리라. 시간은 이제 막 오전 여덟시를 지나고 있어서 스팍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평범한 회색 바지에 회색 스웨터를 골라 입었다. 기념일에 어울리는 옷이 아님을 알아도 달리 기념일에 어울릴만한 옷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짐이 초대하면서 크리스마스도 함께 보내자고 했던 것을 떠올린 스팍이 작은 가방에 옷과 며칠 묵을 때 필요한 개인 용품을 챙겼다. 스팍은 재빨리 요기를 하고 문단속을 했다.
잘 아는 고서점과 또 다른 장소에 잠깐 들러야 했던 스팍은, 일을 다 보고 나서는 짐의 원룸 아파트로 향했다. 스팍은 한 번도 짐의 아파트에 가 본 적은 없었지만 본즈와 함께 보고 나니 짐의 아파트를 아는 기분이 들었다.
오전 열 시 못 미쳐서 짐의 집 앞에 도착한 스팍은 짐이 집에 있기를 바랐다. 짐을 찾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물론 찾아다니겠지만.
잠깐보다 조금 더 되었을까, 스팍이 초조해지려던 차에 문 반대편에서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스팍이 숨을 멈췄다.
아직 어린 생도 짐이 생생하고 멋진 모습으로 그곳에 서서 피곤한 모습으로 스팍을 바라보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인 짐이 입을 열었다.
“스팍 교관님?”
스팍이 천천히 괴로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생도. 짐.”
짐의 머리는 사방팔방으로 뻗치고 퀴퀴한 술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하지만 스팍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짐이 살아 있다. 다시 생생하게. 스팍이 구할 기회도 없이 죽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하세요?”
짐이 조용히 물었다.
“자네가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날 초대했었지. 오늘까지 유효한 초대라고 생각하네만.”
짐이 입을 떡 벌리고 물고기처럼 뻐끔거렸다.
“그렇지만… 거절하신 것 아니셨나요?”
“생각이 바뀌어서 초대에 응하고 싶네. 괜찮다면 말이야.”
아주 느릿하게 짐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스팍을 바라보며 점점 커진 미소는 짐의 얼굴과 스팍이 서 있는 복도까지 환하게 만들었다. 짐이 문을 활짝 열었다.
“당연히 괜찮죠! 들어오세요.”
밝은 목소리였다.
스팍이 집 안에 들어서보니 본즈와 왔을 때 봤던 것과 똑같았다. 부엌 조리대 위에 놓인 빈 위스키 병과 쓰레기통에 버려진 붉은 포장지로 감싼 상자까지도.
짐이 스팍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금세 얼굴을 붉혔다.
“어. 어, 어제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스팍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괜찮아. 그런 날은 누구라도 있네. 나 역시 어제는 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네.”
“교관님도요?”
스팍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평생 그렇게 안 좋은 날은 손에 꼽힐 정도야.”
스팍이 쓰레기통으로 걸어갔다.
“내가 꺼내도 되나?”
짐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팍이 포장된 상자를 꺼내서 짐에게 주었다. 크리스마스트리도 끄집어냈다. 가지 하나가 부러지고 장식도 망가졌지만 아주 못쓸 지경은 아니었다.
스팍이 트리를 짐이 원래 두었던 바로 그 자리에 가져다놓고 모양을 잡았다.
짐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좀 망가뜨려서요. 트리가 없어도 괜찮아요. 크리스마스 안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난 나중에 후회할 만한 말을 많이 했지. 트리는 이대로 두지.”
스팍이 가방을 열었다.
“장식이 망가진 것 같네요.”
짐이 트리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스팍이 상자를 꺼냈다.
“새 장식을 사 왔네.”
짐은 스팍이 건넨 작은 붉은색, 금색, 은색 공이 담긴 상자를 바라보았다.
“와. 교관님은 어떻게―”
스팍은 짐에게 반짝이는 녹색과 붉은색이 교차하는 격자무늬 포장지에 붉은 리본이 달린 상자를 건넸다.
“이건 선물이야.”
“선물을 사오셨군요?”
“원래 이렇게 하지 않나?”
“그렇죠.”
짐이 상자에 제 이름표가 달린 것을 바라보았다.
“누, 누가 저한테 선물 준 거 오랜만이거든요.”
“알아. 변화를 주고 싶었거든.”
스팍이 다정하게 말했다.
짐이 스팍의 눈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렇게 하셨어요.”
“크리스마스까지 트리 밑에 선물을 두지 않겠나?”
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사람은 새 장식으로 트리를 꾸미고 나서, 그 밑에 선물을 두었다.
“짐.”
“네?”
“자네 새아버지인 프랭크란 사람은 지금 어디 있지?”
짐이 약간 놀란 듯 스팍을 바라보았다.
“프랭크 아저씨요? 어. 아마 아이오와 주 리버사이드에 있을 거예요. 왜 물으시죠?”
“그자 때문에 자네가 위험하진 않은지 알고 싶었네.”
짐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프랭크 아저씨는 어떻게 아세요? 제가 이야기를 했었나요?”
“그랬을 걸세.”
“제가 왜 그 사람 이야기를 했을까요. 싫어하는 사람인데.”
스팍 역시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자는 짐 근처에 올 일이 없으리라. 스팍이 화가 나있는 동안에는 더더욱. 그리고 스팍은 화를 풀지 않으리라.
“요리 재료를 사오지 않았어요.”
짐이 말을 돌리려는 듯 털어놓았다.
“그건 나중에 해도 괜찮아. 그러고 보니 생강과자 재료도 사고 싶군.”
“그래요?”
“내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사람 모양 생강과자를 자주 만드셨네. 우리가 그걸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럼요. 좋네요. 뭐든 말만 하세요, 교관님.”
스팍이 눈썹을 휘었다.
“뭐든 말만 하라고?”
짐이 푸른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스팍이 제 머리 위로 겨우살이 가지를 올렸다.
“내가 입을 맞춰 달라고 하면, 해주는 건가?”
“네? 저랑… 진심이세요?”
스팍은 짐이 자신에게 입을 맞출 최선의 방법을 떠올리고 실행했다. 스팍이 겨우살이 가지를 들지 않은 손으로 짐의 턱을 잡고 제 입술을 짐의 입술 위에 갖다 댔다. 짐의 입술은 텄지만 보들보들했고 희미하게 치약의 민트 맛이 났다. 스팍이 혀끝으로 짐의 입술을 가볍게 열어 부드럽고 촉촉한 그 입 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짐이 스팍과 입을 마주대고 신음하며 스팍의 등을 껴안으며 더욱 깊이 입을 맞췄다. 스팍이 겨우살이 가지를 떨어뜨리고 짐을 꼭 끌어안았다
“재료는 나중에 사러 가지.”
스팍이 짐과 입술을 마주대고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짐의 침대로 향하는 사이 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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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라 해도 십이월에는 추워서 둘은 코트와 목도리로 꽁꽁 여미고 걸어서 장을 보러가기로 했다. 둘은 바짝 붙어서 나란히 걸었다. 스팍은 여전히 벌칸인의 습성이 남아서 짐의 손을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짐은 그런 것을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전날 밤 스팍이 들렀던 채식 식당을 지나치려고 할 때 스팍이 그 앞에 멈춰 섰다.
“왜요?”
짐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남자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
“그러세요.”
둘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스팍은 계산대에 선 안내원에게 가서 물었다.
“본즈가 오늘도 근무합니까?”
“본즈요?”
여자는 친절한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데요.”
“죄송합니다, 손님. 본즈란 사람은 없는데요.”
“레오나드 맥코이입니다”
본즈가 말했던 이름을 떠올린 스팍이 다시 물었다.
여자는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사람은 없네요.”
스팍이 실망한 기색을 감추려 노력하며 짐을 바라보았다.
“교관님, 레오나드 맥코이가 누구예요?”
“언젠가 자네 삶에 있어 중요한 사람이 될 남자야. 자네와는 좋은 친구가 될 거야.”
“그래요?”
스팍이 잠시 생각했다.
“나한테도 마찬가지겠지.”
짐이 미소 지으며 스팍의 손을 잡았다. 스팍은 짐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갈까?”
둘은 짐을 잔뜩 들고 짐의 작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오렌지, 견과류, 짐이 사자고 우긴 침엽수 화관, 벽난로가 없는 대신 짐이 벽에 걸고 싶어 한 한 쌍의 양말, 그리고 짐은 그 양말에 담긴 작은 선물들을 스팍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둘은 야채 라자냐와 생강과자 재료를 사왔는데 둘은 오후 내내 생강과자를 만들었고, 짐이 만든 사람모양 생강과자에는 뾰족한 귀가 달려 있었다. 스팍이 그 사실을 지적하자 짐이 웃었고, 스팍은 짐의 웃음 소리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아마 짐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소중했으리라.
라자냐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짐이 스팍에게 트리 아래 놓였던 붉은 포장지로 싸인 상자를 가져다 주었다.
“왜 안 열어보세요?”
“아직 크리스마스가 아니잖아.”
“양말 속을 내일 아침에 보시면 되죠.”
“그렇게 하지.”
스팍이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겨냈다.
짐이 또 다시 웃었다.
“그냥 찢어버리셔도 돼요.”
스팍이 눈썹을 휘었다.
“왜지?”
“글쎄요. 그냥 그래도 돼요.”
“비논리적이군.”
스팍이 포장지를 벗겨내고 상자를 꺼냈다. 상자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스웨터가 들어 있었다. 스팍이 만져보니 무척 부드러웠다.
짐이 부끄러운 듯 눈을 피했다.
“어머니께서 스웨터를 만들어 주셨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서요. 이건 직접 만든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혹시 마음에 안―”
“짐.”
스팍이 손가락을 들어 짐의 입술에 갖다댔다.
“마음에 들어.”
“정말요?”
스팍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야.”
스팍이 일어나 자신이 짐에게 주려고 준비한 선물을 가지러 갔다. 짐에게 선물을 주려고 보니, 짐이 마음에 들어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짐이 웃으며 포장지를 찢어버리고 제 손에 든 양장으로 된 책을 내려다 보았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네요.”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주 최근에 나한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이야기지. 만약 달리 원하는 게 있다면 구해다 주겠네.”
눈에 눈물이 고인 짐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이거면 충분해요. 전 책을 좋아하거든요.”
“정말인가?”
“그럼요. 게다가, 크리스마스에 제가 정말로 바란 건 교관님뿐이었는걸요.”
스팍이 제 이마를 짐의 이마에 맞댔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야.”
스팍은 모든 일을 바로잡을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진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기회가 있어서 정말로, 무척이나 기뻤다. 스팍은 레오나드 맥코이에게 큰 빚이 생겼다. 미래에서 온 레오나드 맥코이는 스팍만큼이나 짐을 사랑한 게 분명했다. 짐을 사랑한다는 생각이 조금은 두려울지도 모르지만, 스팍은 겁나지 않았다. 짐이 이곳에… 살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