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코이랑 나눈 대화에 마음이 편해져야 했다. 짐에게 별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놓여야 했지만 병원에 가기 전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맥코이가 한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설령 짐이 전혀 괜찮지 않더라도 스팍이 알 권리는 없었다.
아처 홀 밖 잔디밭에 놓인 벤치 끝에 앉아 입 안을 혀끝으로 쓸어보았다. 쓰러질 때 깨물었는지 거칠거칠했다. 희미하게 피 맛이 났다. 마음을 굳히고 초조함을 가라앉혔다. 스팍이 기억하던대로 짐의 생기가 진동하는 게 느껴질 때까지 조금씩 보호막을 내렸다. 제 복근을 쓸던 짐의 양 손과 귓가에 울리던 물기어린 애원이 그려내던 화음을 떠올렸다. 스팍이 삼개월간 떠올리지 않은 것들이었다.
짐이 자신을 생각한 적이 있기나 할까? 함께 보냈던 긴 주말과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던 한 시간여의 드라이브, 어둠 속에서 짐의 입술이 주던 흥분을 떠올렸다. 그 장면들 위에 맥코이의 경고가 덧씌워졌다.
“한 번만 더 걔 상처주면 당신도 멀쩡하진 않을 겁니다.”
한 번만 더.
맥코이는 은연중에 앞으로도 스팍 때문에 짐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스팍이 짐에게 직무상 불이익을 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 말은 짐이 여전히 스팍과 연애를 하고 싶어 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인가? 가망이 없는 일이라면 분명 맥코이는 그런 식으로 위협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문자 그대로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맥코이가 한 말은 희망으로 반짝였다.
짐의 아파트에 찾아가 문을 두드려 볼 생각도 했다. 직접 찾아간다면 아마 짐도 저를 덜 외면하리라. 하지만 맥코이가 문을 연다면? 당장은 스팍이 맥코이를 오해했을 수 있고, 그렇다면 맥코이는 스팍을 쫓아내리라. 어쩌면 짐이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아파트로 찾아가지는 말자.
어머니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어머니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탓에 이 곤경에 빠진 것이다. 어머니는 짐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만 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오십팔 분 동안은 강의가 없었다. 밥을 먹는 게 현명한 선택임에도 배가 고프지가 않았다. 그 대신 스팍은 고바야시 마루 모의 훈련 제어실로 향했다. 아침을 먹는 동안 제 팀에 새로운 생도 하나가 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십팔 분 후에 그 생도가 올 예정이었다. 그 정도면 마지막 인턴 생도가 지난주에 작업한 수정사항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존스 생도는 느리긴 했어도 일을 잘 했다. 존스 생도가 한 작업은 거의 손 댈 게 없었다. 존스 생도는 코드 구문을 파악하는 데 뛰어났고 서브루틴에 명령어를 부적절하게 삽입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존스 생도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함선 배치를 명받았다. 한 달 안에 존스 생도는 지구를 떠나게 된다. 브로 생도는 삼 년 동안 그에게 배정된 인턴 중 여섯 번째 인턴이었다.
컴퓨터실에 도착해 출입구에 신분증을 갖다 대는데 그 생도가 이미 도착해 자신을 기다리기에 놀랐다. 그녀가 짐과 아는 사이였던 그 오리온 여성임을 알아보고 한층 더 놀랐다. 감색 점프 수트를 입으니 피부가 어두운 녹색으로 보였고, 붉은 머리카락은 얼굴 뒤로 넘긴 채였다.
“중령님.”
“생도, 편히 하게.”
생도가 경례를 하자 침착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목소리에서 감정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스팍이 대답했다.
“편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중령님.”
“허가하네.”
“문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무적인 말투였다.
“설명해 보게.”
“제가 중령님 인턴으로 배정된 일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여전히 짐이랑 친하게 지내거든요.”
“그렇군. 커크 생도와 자네의 관계가 여기서 근무하는데 영향을 끼칠 일은 없네.”
“공정하시군요.”
대답하는 브로 생도는 안심한 눈치였다. 팔을 편히 내린 브로 생도가 십 도 정도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스팍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시 낭송회에 안 보이시던데요.”
시 낭송회에 또 참석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시 낭송은 계속 하는 모양이군.”
스팍이 짐작했다. 브로 생도가 입꼬리를 올렸다.
“매주 화요일마다 합니다. 요즘엔 감정을 자제하며 낭독하고 있습니다.”
스팍은 짐도 계속 참석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스팍은 2.5초간 브로 생도를 바라보다 창가에 놓인 큰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가 자네 자리야.”
그리고 스팍은 브로 생도에게 로그인하는 올바른 순서 시범을 보였다.
***
그날 저녁 스팍은 파이크 제독이 초대한 저녁 식사에 마지못해 참석했다. 짐과 대화가 끊긴 이후 스팍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피했다. 꼭 필요할 때만 사무실로 찾아갔으며, 용무가 끝나면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러나 파이크는 설명과 함께 21시 15분까지 자신의 아파트로 오라고 연락을 해 왔다.
“꼭 참석하게.”
메시지 마지막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집에 돌아가 명상하며 보호막이 잘 세워졌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미뤄야 했다.
21시 13분에 파이크의 아파트에 도착한 스팍은 남은 이 분 동안 밖에서 기다릴까 생각도 했지만,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일을 피하려 한다는 건 알았다. 현관 벨을 누르고 파이크가 현관에 얼굴을 비칠 때까지 기다렸다.
“중령.”
파이크가 스팍이 들어올 때까지 문을 열고 기다렸다. 스팍이 코트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두었다. 파이크가 인상을 쓰고 손짓할 때까지 스팍은 차려 자세로 대기했다.
“편히 해. 스카치를 마실 건데. 자네도 뭐 좀 마실 건가?”
“물 주십시오.”
파이크가 물컵을 건넸다. 두 사람은 타닥거리며 기분 좋은 열기를 내는 난롯가에 앉았다.
오래되고 효율도 떨어지는 난방 방식인 진짜 통나무를 태우는 모습을 보니 묘했지만, 난로에서는 벌칸 사원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가 났다. 그 향기와 통나무가 타면서 나는 조용한 쉭쉭거림과 가끔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마음이 편해졌다. 스팍이 난로 쪽으로 몸을 틀고 한껏 열기를 받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곧 넘버원이 올 거야. 우리 둘이 조용히 얘기할 시간이 있었으면 했지.”
“사무실로 찾아뵀어도 될 일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일 이야기가 아니라서.”
파이크가 이마를 쓸었다. 스팍이 몸을 곧추세워 앉으며 물을 세 번 홀짝이고 컵을 내려놓았다. 손은 무릎에 얹어놓았다. 파이크가 잔에 담긴 호박색 액체를 흔들더니 인상을 쓰며 마시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팍은 입 안쪽 거칠어진 부분을 혀로 쓸어보다가 멈췄다.
“휴일에 뭐 하나?”
휴일에는 일을 하며 보낼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파이크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에 덧붙였다.
“어머니와 오래 대화를 나눌 것 같습니다.”
“저녁 먹으러 와도 되네.”
스팍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크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거 참.”
파이크가 입을 열었다.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갈라지는 게 독한 술 탓인 모양이었다.
“커크가 곧 고바야시 마루 테스트를 받을 거야. 문제가 없었으면 하네.”
“그게 왜 문제가 된다고 보십니까.”
스팍이 턱을 들어올렸다.
“자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
파이크가 크게 한숨을 쉬더니 소파에 등을 기대고 허벅지에 발목을 걸쳤다. 어깨가 굳어졌다.
“그 일이 일어나자마자 그 녀석 얼굴을 본 건 아니지만 자네들 둘이 서로 피하는 거 보면 뻔하지. 자네가 여기 오는 줄 알면 그놈은 저녁 먹으러 오지도 않을 거고, 자네도 몇 달 동안 우리가 부를 때마다 거절했지.”
스팍이 입을 굳게 다물고 제 양 입술에 찍힌 이빨 자국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세게 깨물었다면 상처가 날 정도였다. 가볍게 입술을 벌리고 난롯불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설명하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그놈이 문제만 생기면 잘 도망치긴 해.”
“짐은 도전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파이크가 덧붙인 말에 스팍이 반박했다.
“상대가 틀린 걸 제가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렇지. 내가 그놈 조기졸업 과정 밟게 하려고 어떻게 한 줄 아나?”
스팍이 생각을 해 보았다.
“넌지시 정해진 기간 안에는 졸업하기 힘들 거라고 하셨군요.”
“그게 통했지. 그놈은 자네 테스트도 뚫을 걸세.”
“불가능합니다. 어떤 계획도 유리한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어있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짐은 납득하지 못할 걸세. 특히 자네 둘이 어쩌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저희 의견 차이 때문에 짐이 의도적으로 테스트를 방해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놈이 자네를 이기려 들 거란 소리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그건 부정행위입니다.”
“그놈 생각엔 안 그래.”
파이크가 일어나 술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자네 둘이 같이 근무했으면 좋겠어.”
스팍 또한 바라는 일이었지만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다.
“자네 둘이 엔터프라이즈호에 탔으면 했지. 사실 여전히 같은 생각이야.”
“함께 근무하는 동료와 제 사이에 인간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함께 일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그렇지만 커크 생도와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미안하네만, 자네는 아직도 마음이 안 편한 모양이군.”
스팍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코로 숨을 내쉬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바라는 것은 비논리적인 일입니다.”
잠긴 목소리였다.
“이보게, 스팍.”
파이크가 걸어와 스팍 맞은편에 앉아서 몸을 기울였다.
“자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는 몰라. 영영 화해 못할 수도 있네. 그거야 자네 둘에 달린 거니까. 하지만 인간은 말일세,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용서를 해. 자네가 정말 그놈에게 마음이 있다면 아직 포기하지 말게.”
“짐이 화해할 생각을 비친 적이 있습니까?”
스팍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목소리에 담기는 희망을 감춰보려 했지만, 스스로도 들을 수 있었다. 넘버원이 아직 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넘버원이라면 비웃었겠지만 파이크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다. 스팍이 숨을 참고 칠 초를 셌다.
“그건 짐에게 물어볼 일이지.”
“혹시... 아시는 한에서, 짐이 누군가와―”
“그건 반드시 짐에게 물어볼 일이지.”
파이크가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현관에서 소리가 들렸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였다. 넘버원이 모퉁이를 돌아오기도 전에 스팍은 넘버원이 뿌린 향수 냄새를 맡았다. 금색 지휘부 원피스를 입고 목에는 스카프를 두른 넘버원은 어마어마한 존재감으로 스팍이 앉은 의자 옆에 섰다. 스팍이 마른침을 삼켰다.
“음, 오래 기다린 것 같네요. 배고프겠어요.”
넘버원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령님.”
스팍이 일어섰다.
“내가 상을 차리지.”
파이크가 넘버원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중령도 뭐 마시겠어?”
집 안에 있는 바로 향하며 넘버원이 물었다.
“물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스팍이 물컵을 들어보였다.
“크리스가 그러는데 크리스 제자랑 자네랑 서로 말 안 한다며.”
넘버원이 잔에 사각 얼음 세 개를 떨어뜨렸다. 스카치를 붓자 얼음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아닙니다.”
스팍이 조용히 대답했다. 파이크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부엌에서는 오레가노와 마늘 향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향기를 보아하니 이탈리아 음식인 모양이었다. 그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표정을 보니 자네는 화해하고 싶은 모양이네.”
그렇게 말한 넘버원이 몸을 돌렸다. 컵 가에 붉은 입술 자국을 남기며 넘버원이 천천히 술을 마셨다. 눈썹을 치켜 올리기에 자신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고 눈치 챘다.
“그렇습니다.”
한 모금 더 마신 넘버원이 손톱으로 컵 옆구리를 튕겼다. 손톱은 푸른색이었다. 존경하는 만큼, 넘버원 앞에서 스팍은 답지 않게 초조해했다. 양 발로 무게 중심을 옮겨가며 호흡에 집중했다.
“커크가 미첼이랑 있었던 일 얘기 한 적 있어?”
스팍이 고개를 저었다.
“음, 나한테 들을 이야기는 아니지만, 중요한 건 이거야. 그 꼬마는 평생 버림만 받았다는 거. 걔가 어른 무릎만 할 때 걔네 엄마가 함선 기관장이었던 건 알거야.”
“어머니께서 정기적으로 지구 밖에 가셨다는 이야기는 한 적 있습니다.”
“한 번에 몇 년도 나가있었어. 나랑 위노나랑 아는 사이거든. 난 위노나 좋아해. 일에 몰두하는 건 나랑 참 닮았지. 위노나는 거기에 애까지 낳을 배짱도 있어. 나쁜 엄마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런 건 아니거든. 애 둘을 얼마나 잘 키웠는데. 그래도 짐은 거의 혼자 컸지. 제 아빠 그늘 밑에서, 옆에 잘 없는 엄마 밑에서. 짐이 열한 살쯤에 걔 형이 도망치고 짐은 타르서스 Ⅳ로 이주했지.”
그 행성 이름에 스팍이 움찔했다.
“몰랐습니다.”
스팍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모르는 거야. 걔한테 말하지 마. 걔가 티내고 다니는 애도 아니고. 그래도 분명히 영향은 있지. 걔는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어. 크리스가 겨우 스타플릿에 데려왔는데 미첼 일이 일어나더니 이젠 자네까지.”
“저는 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만나자고 했지만 거절당한 겁니다.”
스팍이 발끈했다.
“어떻게 만나자고 했는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어쩜 좋아.”
우스운 구석도 없는데 넘버원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인간이랑 일하려면 인간에 대해 공부 많이 해야겠다.”
더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넘버원은 그 대신 부엌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스팍이 넘버원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 늘 앉던 세 번째 의자에 앉았다. 넘버원은 바로 식사를 시작했고 늘 그랬듯이 파이크와 대화를 나눴다. 스팍이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스파게티를 포크로 찍어 감았다.
“뚱해 있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먹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넘버원이 말을 건넸다.
하지만 배가 잔뜩 불러도 스팍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부엌이 빙글빙글 돌고 배처럼 앞뒤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방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알면서도 식탁 모서리를 꼭 쥐고 숨을 골랐다. 두 번. 세 번. 넘버원이 어깨를 두드렸다.
“스팍.”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옷 너머로 전해지는 손은 엄마의 손처럼 따스했고, 스팍은 자신이 벌칸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짐한테 연락해 줄까?”
“그게 아닙니다.”
스팍이 겨우 말을 꺼냈다. 이마께에, 관자놀이에, 코 밑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넘버원이 뿌린 향수가 덮쳐왔다. 속이 뒤집혔고 스팍이 떨기 시작했다.
“제 코트 주머니에 메스꺼움을 가라앉히는 약이 담긴 주사기가 있습니다. 그게 필요합니다.”
“어머.”
넘버원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달리듯 거실로 향했다. 십사 초가 지나고, 차가운 금속이 제 목덜미에 닿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전부를.”
딸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따끔하더니 약이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지만 넘버원은 여전히 스팍 곁을 떠나지 않았다. 눈을 뜨기 전에 스팍은 팔, 구, 십 초를 셌다. 제 앞에 놓인 접시가 분명히 시야에 잡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스팍이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 뭐 때문에 이런 약을 들고 다니는 거지?”
“트프링과 유대를 끊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이마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후유증을 앓는 중입니다.”
“유대를 끊었다고? 힘내게, 스팍.”
“저희가 결정한 일입니다.”
파이크가 말을 받자 스팍이 대답했다.
“그렇군. 눕겠나?”
“저는―”
스팍이 입을 열고 잠시 눈을 깜박였다.
“소파면 될 것 같습니다.”
파이크와 넘버원이 각각 양쪽에서 스팍을 부축하고 소파까지 가서는 걱정하는 부모처럼 스팍 양 옆에 앉았다.
“오늘 혼자 있어도 되겠어? 밤에 또 아프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약 덕분에 아프지 않습니다. 명상만 할 수 있으면 보호막을 제대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네를 억지로 부른 셈이군.”
파이크가 가볍게 웃었다.
“차 끌고 나올게.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혼자 보내면 안심이 안 돼.”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스팍이 아파트에 들어가는 모습을 봐야겠다고 했다. 넘버원은 스팍이 물 한 컵과 담요를 들고 소파에 앉을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통신기는 있어?”
“네.”
대답한 스팍이 꺼내보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게.”
스팍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이 떠났다. 스팍은 리프트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둘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들은 벌칸 청력이 날카롭다는 사실을 종종 잊거나 모르곤 한다.
“스팍을 혼자 둬도 괜찮을까요?”
“문제가 있으면 연락 하겠지. 짐한테 얘기해야 하는 건가.”
“안돼요. 자기들이 해결할 일이에요. 게다가―”
리프트가 도착하고 넘버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리프트 문이 열리고 십 초가 지나 문이 닫혔다. 사십이 초가 지나 멀리서 여닫히는 차 문소리와, 엔진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떠난 것이다.
담요를 가져다 다리를 덮고 쿠션에 등을 기댔다. 소파는 짐의 아파트에 있던 것처럼 편하지 않았다. 스팍은 품질과 무난한 가격을 보고 이 소파를 샀다. 가구를 고르는데 더 좋은 기준이 있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사람 같군, 스팍이 인정했다. 한 꺼풀, 한 꺼풀, 스팍은 짐이 자리하던 제 내면의 한 곳을 개방했다.
아팠다. 스팍은 움찔했지만 그 감각을 받아들였다. 스팍이 보호막을 전부 풀어냈다. 커피숍 탁자 너머 둘의 눈이 마주치던 순간과 협력 회의 때 제게서 멀어지기 직전에 보인 상처받은 짐의 얼굴까지. 그 뒤로 스팍은 짐의 눈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제가 짐에게 연락할 때 뭘 잘못했는지 넘버원과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눴으면 했다. 넘버원이 한 말에 비추어 볼 때, 제 의사소통 방식은 충분치 못했고 어쩌면 부적절하기까지 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제 삼 자의 의견을 구해야 하는데 누가 있단 말인가? 짐을 아는 사람이어야 했지만 맥코이와 다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개리 미첼과는 이야기 하지 않을 터였다.
여전히 짐과 친구라고 솔직하게 먼저 밝히던 브로 생도를 떠올렸다. 내일 아침에 브로 생도를 만나겠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브로 생도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비윤리적이었다. 학교 밖에서 만나자고 청하면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둘은 브로 생도가 인턴이 되기 전부터 알던 사이니까. 교관과 생도가 친하게 지내는 일을 스타플릿이 막기는 해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보자고 청하고 브로 생도가 응했을 때 규정에 위배되는 일은 없었다.
그 생각이 마음에 든 스팍이 잘 준비를 하며 깨끗한 잠옷을 꺼내려 아무 생각 없이 옷장을 열었다. 스팍이 꺼낸 것은 제 것이 아니었지만 닿자마자 뭔지 알아차렸다. 짐이 아침에 제 집에서 제 어머니를 만나던 날 마지막으로 입었던 검은 티셔츠였다. 짐은 그 셔츠를 벗어두고 갔다. 다음에 짐이 오면 돌려줄 생각으로 빨아두었지만 그 뒤로 짐이 오는 일은 없었다. 학교에 가져가는 것은 옳지 못한 기분이 들어 제가 보지 못하도록 서랍 밑바닥에 넣어뒀었다.
그저 셔츠일 뿐이었다. 짐의 일부도 아닌데 스팍은 세제 냄새 말고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셔츠를 가슴에 끌어안고 깊게 냄새 맡은 뒤 그 셔츠를 입었다.
이번 옮긴이 브금은 케니지의 Es hora de decir.
오랜만에 케니지가 듣고 싶어서 케니지 노래들을 막 돌리다가 건졌다. 그래, 오늘은 케니지가 듣고 싶었어 ㅠㅠ
가사가 나와서 집중해서 듣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익숙해서 누가 부른 건가 구글링해보니 Camila가 부른 노래였다!!! 0_0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 (옮긴이 브금에 Camila는 벌써 두 번째 출연)
Camila로 검색해보니 원제는 Es hora de decir adiós.(작별을 고할 시간[이야])인 모양.
어머, 이 제목 어쩔거니~ 내 취향일세~
언제나처럼 옮긴이 브금은 옮기면서 들은 노래이지 소설의 내용과 관계는 없습니다.
+ + +
McCoy's word choice implied that there would be a future opportunity for Spock to hurt Jim.
맥코이는 은연중에 앞으로도 스팍 때문에 짐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1. 맥코이의 어휘 선택은 스팍이 짐을 상처줄 미래의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직역)
2. 맥코이의 어휘 선택은 앞으로도 스팍 때문에 짐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뜻을 담고있었다.
2. 맥코이가 한 말에는 은연중에 앞으로도 스팍 때문에 짐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3. 맥코이는 앞으로도 스팍 때문에 짐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뜻을 담은 말을 했다.
고민되는 문장이 나오면 이렇게 저렇게 바꿔서 옮겨본다. 이 문장 뒷부분이야 직역을 의역으로 바꿔줘도 상관 없지만, 오히려 앞부분에 나온 '맥코이의 어휘 선택'이라는 직역 표현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고민을 했다. 사람에 따라 2번을 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고민끝에 나는 형태를 포기하고 의미를 살리기로 했다. 그래도 역시 저 표현 아쉬워... 해놓고도 계속 고민하게 되는 문장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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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이 마음을 가다듬을 때 보면, 요가 명상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 많다. 요가를 배운 덕분에 그런 구절을 보면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는데, 문득 그게 오히려 번역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아는 거야, 하고 자기 생각에 빠지면 그대로 오역의 길로...orz 그래도 그런 구절을 볼 때마다 반갑긴 하다. 이번에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코로 숨을 내쉬는 장면에서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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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특히 대화문이 많아서, 정말 말 처럼 느껴지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걸 하나하나 적으려니 너무 많고, 그렇다고 고르기도 애매해서 그냥 다 생략했다. 급하게 하다보니 일일이 적지 못하기도 했고;;; 나중에 여기서 수정할 게 많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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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속 스팍은 연애 앞에서는 진짜 바보네요. 파이크 앞에서 고개 번쩍 들어버리면 어떡하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파이크니까 안 웃었지... 그나저나 파이크 진짜 좋네요. 커크만이 아니라 스팍도 마치 자식처럼 챙기고... 다정하다 ㅠ
이제 한 챕터 남았습니다. 다음에 옮길 부분은 읽을 때마다 늘 즐거운 부분입니다 ㅋㅋㅋㅋ
그나저나 슬슬 다음에 옮길 글을 골라야겠네요. '-'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