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은 출입문에서 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방문할 사람은 없었다. 짐은 저와 발을 얽고 조용히 코를 골면서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스팍은 짐의 허리 곡선을 손으로 쓰다듬고 목덜미에 입을 맞춘 뒤 일어나 덧옷을 걸쳤다. 배달원이려니 생각하고 현관 모니터로 걸어갔다. 어머니였다. 스팍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벽에 기대어 벌칸어로 욕을 내뱉었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몇 가지 선택지를 살폈다.
어머니를 길바닥에 둘 수는 없었다. 짐에게 가라고 하지도 않을 터였다. 짐이 계속 잘 수도 있지만 일어난다면? 침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다면 왜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느냐고 물으리라.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는 어머니에게 밝히고 둘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스팍이 화면 앞에 서자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안녕.”
어머니가 종이봉투를 들어보였다.
“연락해도 답이 없어서 아침 사왔어.”
스팍이 고개를 끄덕이고 버튼을 눌러 현관 출입구를 연 뒤 이를 닦으러 갔다. 짐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계속 잠들어 있기를 바랐지만 짐은 킁킁거리더니 돌아누웠다.
“일어났네요.”
잠에서 덜 깬 목소리였다.
“곧 어머니가 오실 거야.”
스팍이 짐의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스팍의 말을 이해하느라 짐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이런. 알았어요. 샤워해야겠다.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내 옷 중에 아무거나 입어도 괜찮아.”
짐이 스팍에게 활짝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음, 나는 조금 있다 나가면 되요?”
스팍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면서 복도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어머니는 빠르게 네 번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스팍이 인사하고 손에서 봉투를 받아 거실로 옮겼다. 소파 앞에 놓인 낮은 탁자에 봉투를 올려놓고 어머니에게 앉으라고 했다.
“네 아버지는 아침 내내 회의야. 바쁘지 않으면 같이 시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했지.”
금요일에는 수업이 없었고, 스팍 자신이 해 본 적은 없어도 교관이 집무 시간에 업무를 보지 않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어머니가 웃으며 봉투를 뒤져 냅킨 몇 장을 펼쳤다. 어머니는 그 위에 패스트리 두 개와 과일 샐러드를 올려놓았다. 어머니가 크루아상을 가리켰다.
“너한테 먹어보라고 할까 했지. 혹시 몰라서 과일도 사왔어.”
바로 그 때, 욕실에서 들려온 소리는 틀림없이 물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였다. 짐은 인간이었고 물로 하는 샤워를 선호했다. 또한 제 집의 수압이 “엄청나다” 한 적도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짐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표정하려 노력하며 과일 샐러드로 손을 뻗었다. 스팍은 빵집에서 포크를 주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포크를 가져오겠습니다.”
어머니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누가 샤워하니?”
스팍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친구입니다.”
“너한테 이탈리아 음식 소개해 준 친구니?”
일부러 애매하게 말한다고 좋을 게 없었다. 짐이 방에 들어오면 바로 아실 터였다.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 사람도 이름은 있지 않니?”
“짐입니다.”
어머니가 크루아상을 집어 들었다.
“그래, 나머지 하나는 짐이 먹으면 되겠네.”
짐이 제 튜닉과 짙은 색 바지를 입고 제가 쓰는 비누 냄새를 풍기며 제 침실에서 맨발로 나오기 전까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팍은 그저 짐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뿌듯했다. 짐은 입술을 핥으며 걸어왔고 눈으로는 스팍 옆자리와 빈 의자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짐이 마음을 정하도록 스팍이 제 옆을 조금 내주었다. 짐이 앉았다.
“네가 짐이구나. 나는 아만다야.”
“여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짐이 손을 내밀었다.
둘은 악수를 했다. 짐이 자리에 앉아 스팍의 어깨에 기댔다.
“음, 놀랍네.”
“좋은 뜻입니까?”
짐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럼. 근데 확실히 놀랍네. 둘이 어떻게 만난 거야?”
“시 낭송회에서 만났습니다. 둘 다 스타플릿에서 강의도 합니다.”
“저는 삼 학년입니다. 강의 몇 개를 맡긴 했지만요.”
“시간이 나?”
“불면증이 있거든요.”
짐이 씩 웃었다. 스팍이 짐을 돌아보았다.
“수면 장애가 있는 줄은 몰랐군.”
짐이 옆구리를 찔렀다.
“음, 요즘은 괜찮아요.”
스팍은 그 말에 담긴 의미에 미소 지었다. 어머니가 짐이 보내는 쉽지 않은 일과에 대해 묻기 시작하니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은 곧 활발하게 대화를 나눴다. 짐이 스팍과 어머니에게 커피를 내려주더니 시계를 보고 가야겠다고 했다.
“전술 강의가 있어요.”
짐이 가방을 멨다.
“오늘 저녁에 보죠?”
“그럴 거야.”
스팍이 대답해주었다.
짐이 가고 나서 아만다가 스팍을 돌아보았다.
“쟤 맘에 든다. 너랑 잘 어울려. 트프링 이야기는 했니?”
스팍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정할 일이기는 한데, 내가 짐이라면 지금 트프링 이야기를 듣는 게 몇 년 지나서나 아니면 오늘 저녁에 듣는 것보다는 나을 걸.”
“짐과 오래 사귀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니 속이 아파왔다. 심리적인 이유 같았다. 스팍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걔는 너 사랑해. 얼굴에 쓰여 있던데.”
“짐이 특정 벌칸 문화에 함께하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팍이 애매하게 말하며 옷소매 끝을 만지작댔다. 아만다가 눈을 치켜떴다.
“나도 안 도망쳤거든. 걔가 나보다 튼튼하잖아.”
부모님이 성행위를 하는 상상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만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샤워기 소리에 난 어땠겠니.”
***
스팍이 박물관 방문을 중심으로 계획을 짠 오후를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아만다는 도시에서 빈둥거리는 게 최고라고 말했다. 둘은 해안가를 걷고 교정에 잠깐 들러 교수실 문에 메모를 남겼다. 아만다가 짐을 발견하고 구내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스팍은 집무를 취소하기로 한 결정을 번복했다. 스팍은 지난 번 강의 주제였던 가정법 시제의 올바른 용법에 대해 질문한 학생 셋을 만났다. 어머니는 교수실에서 전자패드로 글을 읽는 스팍을 찾아왔다. 짐이 뒤따랐다.
“누구랑 점심 같이 먹을지 맞춰볼래?”
즐거운 목소리였다.
“짐이 맛있는 피자집을 안대.”
“파이크 아저씨가 좋아하는 곳이에요.”
짐이 스팍을 보고 설명하자 스팍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평범한 치즈 피자에 맥주 피처 하나를 나눠 먹었다. 스팍은 그냥 물을 마셨다. 스팍은 파이크 함장 및 그의 일등 항해사와 함께 이 식당을 세 번 방문했다. 피자 자체는 두 사람이 사는 집 근처 식당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파이(Pi)’가 더 나은 이유가 분위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인간들 스스로는 실제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여기겠지만) 스팍은 어이없는 식당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얀색과 붉은색 격자무늬 식탁보에 점점이 늘어진 작은 초가 놓인 어두운 실내는 뭔가 기분 좋은 구석이 있다고 인정했다.
짐은 밥 먹는 내내 스팍의 다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아만다는 둘이 나란히 앉아야 한다고 했다. 짐은 스팍을 바라보며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미소를 지었고 심지어 스팍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준 뒤에도 엄지손가락을 잠시 떼지 않았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짐과 정신을 합하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처럼 자신이 제 몸과 따로 존재하는 기분일까?
어머니가 함께 있는 것을 깨닫고 몸을 굳혔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을 용인하는 듯 했다. 어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짐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고, 짐이 스팍에게 애정을 표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그 미소는 더 짙어졌다. 흥미롭군. 이 이론을 실험해 보기 위해 스팍은 짐에게 냅킨을 건네받으며 일부러 손가락이 포개지게 내버려 두었다. 어머니의 반응을 기다리며 스팍이 숨을 죽였다. 어머니는 짐을 벌칸에 두 달간 초대하며 제 이론에 부응했다.
***
스팍은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협력회의에 참석할 옷으로 갈아입었다. 넉넉잡고 한 시간 안에 대사관에 도착해 부모님을 스타플릿 사관학교로 안내해야 했다. 트프링 부녀가 따로 오기로 한 데 안심했다. 트프링 부녀와 동석하겠지만 오늘 밤은 생각보다 덜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하나당 열 명씩 자리하는 원형 연회 탁자가 놓인 큰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스팍은 눈으로 훑으며 특별히 두 사람을 찾았다. 짐은 파이크 제독의 일등 항해사 넘버원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고 자신이 들어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 붉은 제복을 입은 짐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제복 때문에 볼이 상기되어 보였다. 이마를 덮은 머리는 뒤로 넘겨 정리했다. 스팍은 차분히 마음을 달랬다.
트프링은 다양한 와인이며 잔이 놓인 반대편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제공되는 설명을 정독하고 바텐더에게 주문하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기도 전에 짐의 향수 냄새를 맡았다.
“여기 있었네요.”
짐이 스팍의 어깨에 손을 올려 몸을 돌렸고 두 사람이 마주했다. 스팍의 어깨에 올려놓지 않은 다른 한 손에는 맥주를 들었다.
“계속 찾았잖아요.”
“미안하군.”
서둘러 대답한 스팍은 트프링이 와인 잔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에 한 발 물러섰다.
“자리 잡았어요?”
“아버지와 함께 앉을 거야.”
“아, 그렇겠구나.”
짐이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사실을 잊은 데 민망해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파이크랑 앉아야겠네요.”
짐이 스팍을 바라보며 3.4초간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짐이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면, 때마침 트프링을 만날 일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트프링은 둘 곁에 서서 짐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짐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저는 짐 커크에요. 스팍이랑 친구죠.”
“제가 벌칸에 살고 있으니 처음 뵙겠네요. 트프링입니다.”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우호적이었다. 비논리적이지만 스팍은 숨을 죽이고 트프링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스팍의 아내죠.”
움츠리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마는, 스팍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만히 바라보자 짐은 눈을 두 번 깜박였다. 짐이 크게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그런 표정에 따라와야 할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스팍을 돌아보는 눈빛이 차가웠다.
“아내요?”
짐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은 끔찍했다. 짐은 맥주를 벌컥 마시고는 재킷 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참나. 왜 여태 말 안했어요? 축하해요.”
“짐―”
“이런, 자리 잡고 앉아야겠어요.”
짐이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짐은 스팍을 돌아보면서도 눈을 피했다.
“자리가 거의 다 찼네요.”
“오늘 저녁에 전화하지.”
“아, 신경 쓰지 마요.”
짐이 가볍게 받아쳤다.
짐이 다시 웃으며 트프링에게 맥주잔을 살짝 기울이고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스팍은 가슴팍을 내려다보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낯선 무게감이 가슴을 채웠다. 주먹을 휘둘러 없애버리고 싶었다.
“아.”
짐이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할 만큼 멀어지자 트프링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트프링이 와인 잔을 입에 대고 마셨다.
“쟤가 짐이구나.”
스팍이 트프링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알지?”
“네 정신 보호 기술이 향상될지도 모르겠다. 쟤 화났네. 그러게 거짓말 하지 말았어야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변명하면서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우리 상황 이야기 안 했잖아.”
트프링이 지적하며 다시 와인을 마셨다.
두 사람은 스팍의 부모님, 소렌, 벌칸 과학 학술원에서 온 다섯 명과 함께 자리했다. 벌칸에서 온 다섯 명은 서로 소개한 뒤로 스팍에게는 말을 걸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대화를 나누었다. 상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스팍은 벌칸 과학 학술원 입학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가르쳤을 교수의 기조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교수의 생각은 참으로 훌륭해서 우주를 이해할 만 했다. 스팍이 집중할 가치가 있었다.
짐은 그날 저녁 내내 열일곱 번이나 스팍을 돌아보았지만, 스팍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피했다. 탁자 밑에 통신기를 숨겨서 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무릎께로 시선을 주는 모습을 보아 제 연락을 받은 것은 알았지만 답이 없었다. 오히려 짐은 짙은 머리카락에 작은 눈을 한 왼편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 관심을 돌렸다. 짐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마찬가지로 붉은 생도복을 입었다. 짐이 남자의 이두박근에 두 번 손을 댔다. 남자도 짐을 만지더니 한 번은 귓속말을 하려 몸을 기울였다. 그 행동에 짐이 웃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짐이랑 싸웠니?”
어머니가 주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머니는 빈 잔에 와인을 받아 탁자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이리 와서 같이 앉아도 된다고 했더니 방해하기 싫다고 하더라. 눈도 안 마주치고.”
“트프링과 만났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와인 잔을 튕겼다.
“그러니까 그 말은 트프링이 네―”
“그렇습니다.”
스팍이 말을 잘랐다. 이런 식으로 어머니께 결례를 범하는 게 잘못된 일임에도 어머니의 입에서 또 다시 그 말이 나오길 원치 않았다.
“설명할 시간을 안 주더군요. 오늘 저녁에 이야기 할 생각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날 저녁에 짐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스팍의 집에도 들르지 않았다. 가슴에 베개를 끌어안고 남아있는 짐의 향기를 맡았다. 스팍은 침대 옆 탁자 위에 통신기를 올려두고 계속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짐이 제게 연락을 주기라도 할 듯이. 스팍이 짐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전화를 해 달라는 말이었다. 설명은 하지 않았다. 짐은 직접 만나 설명해야 할 사람이었고, 그래야만 스팍도 오해가 풀렸는지 확실히 알 터였다.
아침을 먹으면서 아만다가 오랫동안 따지듯 스팍을 쳐다봤지만 나무라지는 않았다.
“사과할 방법이 있을 거야.”
아만다가 버터를 건네 달라고 했다. 아만다는 세모난 토스트 위에 아무렇게나 버터를 발랐다. 어머니가 만족해하며 먹는 모습을 보아도 식욕이 일지 않았다. 어머니가 토스트가 담긴 바구니를 제 쪽으로 밀었다. 마멀레이드만 발라 두 조각을 억지로 먹었지만 거의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
그 후 닷새는 비논리적이지만 정말 짜증날 정도로 느릿하게 지나갔다. 스팍은 하루가 사실 제 시계가 표현할 수 있는 지구의 스물네 시간보다 더 긴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짐에게 연락이 없는 매 순간이 영원처럼, 헤아릴 수 없이 늘어져 제 감정을 휘저었고 짐이 곁에 없다는 상실감에 속이 뒤틀렸다.
짐은 인간이지만 총명하니 스팍이 설명했다면 이해하지 않았을까? 문화가 다르다는 걸 알지 않았을까? 역사에 따르면 불과 얼마 전까지 지구에도 정략혼이 있었다. 저를 사랑하는 제 마음을 짐이 의심했을까?
짐은 연락이 없었다. 복도에서 짐을 두 번 목격했지만 월요일 점심시간 구내식당에도 없었다. 짐을 불러 제가 있음을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서 만날 생각도 했다. 스팍이 계급이 더 높았으니까. 스팍이 생도인 짐을 부른다면 대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지는 않았다. 스팍은 짐이 제 시야에서 멀어지게 내버려 두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나랑 유대 끊고 싶다면 반대하지 않을게.”
떠나기 전날 해변을 걸으며 트프링이 말을 걸었다.
“짐은 나랑 사귀지 않을 거야.”
스팍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걔는 너한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걸. 나는 그렇게 못해.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너는 좋은 반려가 될 거야.”
“그러려고.”
트프링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네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까?”
트프링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트프링이 턱을 들어올렸다.
“내가 선택할 일이라 하시겠지. 시간이 없어서 누군가 죽어야 할 때까지 기다리느니 지금 결정하는 게 합리적이야. 벌칸에 돌아가면 의회에 의견을 낼게.”
“우리식은 아니야.”
스팍이 머뭇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결과 나오면 알려줄게.”
***
수요일 아침에 부모님이 떠날 준비를 했다. 그날 아침 두 분이 짐을 싸는 동안 스팍은 대사관 내 명상 정원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 손을 얹고 정원 한가운데 놓인 크고 네모난 분수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벌칸에서 물은 귀한 자원이었기에 감각을 자극할 용도로 쓰는 일은 비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물이 풍부한 지구에서 스팍은 그 소리를 즐겼다.
사십팔 분이 지나 트프링이 찾아왔다. 트프링이 어깨에 손을 얹자 스팍이 일어섰다.
“헤어질 시간이네.”
내면을 다정하게 쓰다듬자 트프링의 볼이 살짝 패였다. 트프링은 제 행동으로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앉아 차를 타고 여객 부두에 도착했다. 헤어지기 전 트프링이 벌칸식 인사를 하는 제 손에 손을 맞댔다. 스팍도 제 손을 지그시 눌렀다. 연인끼리 하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스팍은 그것이 단지 친구 간에 나누는 작별인사임을 알았다.
“행운을 빌게라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스팍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어머니가 뺨에 입을 맞추고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지구의 시집이었다.
“모으잖니.”
어머니에게 감사하며 장수와 번영을 기원했다.
돌아오자마자 그 책은 표지가 안 보이게 서랍에 넣어 시야에서 없애버렸다.
***
아무 소식 없이 이 주가 흘렀고, 스팍도 관심을 끌기를 포기했다. 마지막 닷새 간 메시지는 점점 짧아졌다. 짐이 읽기는 하는지, 보자마자 지워버리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자신을 수신 거부하고 전혀 제 메시지를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마음이 요동쳤다.
강의실 앞에서 짐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라 짐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09시 30분까지 짐은 아처 홀에 있는 강의실 A에 있을 예정이었다. 자신도 같은 건물에서 09시 45분에 강의가 있었다. 제 강의실에서 강의실 A까지는 걸어서 2분이 걸리니 13분의 여유가 있었다. 스팍은 강의실 정문인 쌍여닫이문에서 적당히 떨어져 섰다. 짐이 자신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해도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제 모습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호감을 느끼길 바랐다.
금발 머리 남학생이 열 셋 있었지만 그 속에 짐은 없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학생들의 발길이 멈추어 스팍이 강의실을 들여다보니 텅 빈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의학부 건물과 이어지는 복도로 난 다른 출구로 나간 모양이었다. 짐과 함께 살던 남자의 뚱한 표정을 떠올렸다. 피하는 게 좋겠지만 짐과 함께 사는 이상 매일 볼 테니 맥코이와 이야기하는 것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09시 43분이었고 강의실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바쁜 걸음으로 정확하게 09시 45분에 강의실에 도착했다. 스팍은 강의실에 앉은 생도들을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뒷짐을 진 채 자신을 소개하고 제 강의계획서에 설명한 성적 평가 기준을 언급했다. 고개를 들어 둘째 줄에 앉은 청년을 바라본 건 질문이 있냐고 물었을 때였다.
스팍은 즉시 협력회의 때 본 남자임을 알아챘다. 짐 옆에 앉아 팔을 만지고 짐을 웃게 했던 그 청년이었다. 배를 얻어맞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이를 악물고 청년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교수실로 돌아온 스팍은 최근에 학교 시스템과 동기화 된 좌석 정보를 전자패드 화면에 띄워 그 청년의 이름이 개리 미첼임을 확인했다. 남자의 기록을 보았다. 남자는 인간이었고 스물네 살이며 성적이나 적성검사를 보아하니 지휘부에 소속된 괜찮은 학생이었다. 이 년 전, 남자는 폭행으로 레오나드 맥코이 박사를 고발했다. 그 이름에 눈썹을 치켜 올린 스팍이 기록을 좀 더 읽어나갔다. 그 사건은 교내 심의위원회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기각됐다. 개인적인 일과 관련된 문제로 학교 밖에서 목격자 없이 발생한 일이었다. 심리 내용을 읽어보려 했지만 크리스토퍼 파이크가 열람을 금지시켰다. 스팍은 인상을 썼다. 학생간의 다툼이, 게다가 기각도 된 일이 그럴만한 일인가? 심리 내용 대신 증인 명단을 본 스팍은 유일한 증인이 제임스 T. 커크인 것을 보고 납득했다.
아파트에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짐이 개리라는 사람에게 빈 방이 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맥코이는 그 말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았고 짐이 전에 사귄 누구랑 비교해도 스팍이 더 낫다고 했다. 짐의 기록을 불러왔다. 짐은 일 학년 때 팔개월간 스타플릿 소유 건물에 거주하다 현 거주지로 주소를 바꾸었다. 좀 더 알아보니 개리 미첼은 재학 삼 년 내내 짐이 전에 살던 거주지에 살고 있었다.
마음이 혼란해 평정심을 잃었다. 전자패드를 내려놓고 명상을 시작했다. 교수실은 명상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트베이가 언제든 올 수 있었다. 그래도 스팍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숫자를 거꾸로 셌다. 생각이 십 년 단위로 쌓여 가지런히 줄을 맞춰 정리되어 있다고 상상하며 구분하는 게 늘 도움이 됐다. 스팍은 짐에 대한 기억에 지금 얻은 정보를 더해 정리했다. 짐에 대한 기억을 담은 상자 옆에 짐의 팔에 손을 올린 개리에 대한 기억을 올려두었다. 짐에게 닿은 손길이나 전에 살던 집 주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이었든 짐이 그 관계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조금씩 생각에서 빠져나와 책상과 밋밋한 벽을 바라보았다. 짐에 대한 기억을 무사히 한쪽에 밀어두니 가슴이 덜 저몄다. 스팍은 짐을 챙겨 간단히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짐을 발견한 건 창가 쪽 식탁에 앉았을 때였다. 짐은 다른 남자와 함께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뒤돌아 앉아 있었지만 짙은 머리카락에 어깨 넓이로 미루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짐이 남자를 만지지는 않았지만 미소를 지었고 개리도 마주 웃어 주는 듯 했다. 개리의 듣기 싫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시절, 여섯 살 생일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어머니가 운 적이 있다. 스팍은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화가 날 때면 양쪽 눈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릴 뿐이었고 주먹을 쥐면 사라졌다. 지금은 화는 나지 않고 그저 우울함에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눈이 그때처럼 따끔거렸다. 눈이 뻑뻑한 것도 아닌데 눈을 깜박이자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눈물이 났으리라. 오늘은 화창한 날이었다.
식판에서 두 번 다시 고개를 들지 않고 밥을 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짐이 더 이상 자신과 대화할 마음이 없다면 그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옮긴이 브금은 후카미 마호의 밤 벚꽃(夕桜).
+ + +
"Morning," she said and held up a takeout bag. "You didn't answer your comm, so I brought breakfast."
“안녕.”
어머니가 종이봉투를 들어보였다.
“연락해도 답이 없어서 아침 사왔어.”
뒤따르는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그 아침이라는 게 빵과 과일 샐러드라서 베이커리 카페 같은 곳의 테이크아웃 백이라고 생각하고 종이봉투로 옮겼다. 아침을 가져왔다는 말도, 앞서 나온 테이크아웃 백과 연결지어서 아침을 사왔다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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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he said groggily.
“일어났네요.”
잠에서 덜 깬 목소리였다.
hey는 격식을 차리지 않고 누군가의 주의를 끌거나 놀람, 관심, 짜증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함께 잠들었던 사람에게 하는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 봤다. 으으, 아아, 아으.. 이런 것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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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am," he said and stuck out a hand. "It's nice to meet you."
“여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짐이 손을 내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머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9월 25일 추가)
번역을 하다보면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 ma'am역시 '부인'으로 배웠는데 나이 지긋한 어르신도 아니고 20대는 '부인'이라는 말을 거의 안 쓴다고 생각했다. 쓴다 해도 '네 부인은 잘 지내냐?'처럼 3인칭으로 지칭할 때 정도이고, 그나마도 실제로는 '네 와이프 잘 지내냐?'라고 할 거다. 다른 대체어가 없을까 네@@에서 제공하는 영한사전을 전부 참고해도 '부인, 아주머니, 마마, 마님, 선생님' 정도만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영영사전을 보았다.
People sometimes say ma'am as a very formal and polite way of addressing a woman whose name they do not know or a woman of superior rank.
이름을 모르는 여성을 매우 공손하고 정중하게 부르거나 직급(계급)이 높은 여성을 부를 때 'ma'am'을 사용한다.
이 뜻을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백화점에서 남자 판매 사원들이 '부인'이란 말을 들을 법한 아주머니들을 보통 '사모님'이라고 지칭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친구끼리는 '와이프'라고 하지만 상사나 선생님의 아내는 '사모님'이라고 지칭하지 않나. 아만다가 벌칸 대사의 아내이고 또한 교관의 어머니임을 생각하면 '사모님'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옮겼다. 여사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커크가 스팍이랑 훨씬 친하니까 스팍 중심으로 '-'
(10월 1일 추가)
다시 보니 여사님이 맞는 것 같아서 수정. 함께 고민해 주신 K님 감사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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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ck found the name ridiculous (humans believed themselves far more clever than reality),
(인간들 스스로는 실제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여기겠지만) 스팍은 어이없는 식당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피자, 즉 일종의 파이(Pie)를 파는 식당의 이름을 발음이 같은 '파이(Pi;원주율 및 그를 나타내는 기호)'라고 짓다니 나 좀 똑똑한 듯, 하고 이름을 지은 인간이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스팍은 공감 못하는 구절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괄호를 앞으로 당겨오고 문장을 끊었다. 인간의 말장난도 잘 모르면서 인간 무시하냐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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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cringe served no purpose, yet Spock wished nothing more than to curl into himself on the floor.
움츠리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마는, 스팍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curl into 역시 cringe처럼 웅크린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뭐할지 생각해보면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는 거 밖에 더 하겠나. 자세도 딱 그렇게 되니 의역했다. 에라이 못난 놈. 그러게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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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 deserved to learn the truth in person, so Spock could be certain he did not misunderstand.
짐은 직접 만나 설명해야 할 사람이었고, 그래야만 스팍도 오해가 풀렸는지 확실히 알 터였다.
짐은 직접 만나 사실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라는 뜻인데 뒤에 so Spock~과 어우러지게 전체적으로 스팍을 주어로 해서 옮겼다. 근데 마음에 썩 들지는 않네... 좋은 의견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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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 was human, but he was intelligent, and surely he understood that Spock must explain?
짐은 인간이지만 총명하니 스팍이 설명했다면 이해하지 않았을까?
스팍이 설명했어야 하는 것을 이해했겠지? 뭔말이야 -_-? 그러니까 (스팍이 설명해야 하는 걸 설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설명했다면 (인간이라도 똑똑하니까) 이해했겠지? 라는 말이로구나. 아이고 orz
이해했겠지? 라는 말투가 영 스팍 같지 않아서 이해하지 않았을까?로 꼬았다. 꼬인 건 풀고, 풀어져 있는 건 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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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he blinked, moisture blurred his vision before the skim of tears evaporated.
눈이 뻑뻑한 것도 아닌데 눈을 깜박이자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the skim of tears가 눈물막이고 evaporate는 증발하는 것이니까 눈물막이 증발하기 전에?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해보니 눈물막이 마르면 눈이 뻑뻑해지고, 눈이 뻑뻑해지면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그런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의역했다.
이번 편은 유난히 풀어서 의역한 게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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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은 2장 마지막 부분처럼 초반부터 글씨가 빽빽하네요. 으아-
참, 스팍은 참 많은 사람에게 꾸지람을 들을 겁니다 ㅋㅋㅋㅋ 암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장 트프링도 거짓말했다고 뭐라고 하잖아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